초등학생 때 시 백일장에 나갔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저학년 꼬꼬마들이 각기 자리를 채우고 앉았다. 선생님 두 분이 지도 교사로 나오셨다.
선생님들은 칠판에 분필로 '아버지'와 '자동차'라는 주제를 또각또각 쓰시고, 우리에게 각자 쓰고 싶은 주제에 손을 들면 다수결로 정하겠다고 하셨다.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라는 주제로 가면 낯부끄러운 사랑고백을 남들 다 보는 데서 공개적으로 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담백하고 쓰기 쉬울 것 같은 '자동차'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버지'에 손을 들었고 나와 몇 명의 아이들만 '자동차'에 손을 드는 것이었다.
이제 자동차는 안 되겠구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 중 한 분이 소수의 의견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오늘의 주제는 자동차입니다! 라고 못을 박으셨다. 다수결이 소수 의견의 존중으로 변한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원하던 주제였던지라 즐겁게 쓰고 집에 왔다.
몇 년이 지나 우리 가정이 해체되고 어딘가에서 적당히 살고 있던 중에 문득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라는 주제를 쉽게 쓸 수 없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신 건 아니었을지.
가정의 달이 오고 연휴의 시작으로 공기가 들뜨고 곳곳에서 카네이션이 원색 색채를 발하면서 학교에서 여러 이벤트가 일어나면 아이들은 가족이 자기 안에서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소보다도 더.
어제, 어버이날, 바로 그런 잡스러운 집안 사정이 기저에 깔린 채로 엄마에게 화를 낸 지 며칠 안 되었는데다 그로 인해 흐트러진 기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칙칙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을 맞아 웹툰을 열어 보았다. 오랜만에 들른 플랫폼의 연재란에 <야오네집>이 없어서, 설마? 하고 완결웹툰 목록으로 가 보니 정말로 완결이 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분량을 보았다.
주인공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만화를 그리는 지금의 시점과 국민학생 시절 부모님과 함께였던 외동딸의 시점을 갈마들면서 복잡한 애증과 상처로 얽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갈무리한다.
- 지옥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에 있다는데
내가 사는 세상과 이웃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자기 파괴적이고 비뚤어진 욕망 같다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자신의 무의식을 대하는 태도라는데
증오심에 연료를 공급하던 집단이 사라지면 비대해진 증오심은 어디로 향할까? (152화 중)
- 한 켤레도 아니고 한 짝씩만 엮인 짚신 묶음은
운명의 어딘가가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어딘가 모자란 자식을 낳고
먼지투성이 돌밭길을 함께 걸어야 하는 불편한 동행으로 엮인 이유에 대한 질문이자 답 같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인연이었지만 어쨌든 내게 주어진 가족이니 내 인생의 일부였고
독립할 때까지는 지지고 볶으며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가족은 내게 발목을 잡는 덫이면서 여행을 계속하게 밀어주는 돛이기도 했기에. (154화 중)
신의 유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현자의 글을 적시에 마주쳐 해답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우연이 있다면 그것을 신의 손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주운 카네이션 사진에 적당한 문구와 이모티콘을 넣어 엄마와 아빠에게 문자를 했다. 감사가 담긴 답장이 금방 날아왔다.
내가 꿈에 그리는 자식이 아닌 것처럼 우리 부모님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도 아빠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성공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뿐이다. 혈연에게 비비 꼬인 마음을 내놓아 보인다고 해도 결국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스스로 해소하고 감정과 상황에서 나를 분리해 덜 부대끼려고 노력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독을 먹이기도 마시기도 싫다.
가정의 달을 맞아 나는 가정을 잘 버텨온 나에 대해 기념할 것이다. 크든 작든 깨졌든 깨지지 않았든 가정의 무게를 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축배를 들 자격이 있다. 올해 잔을 들 힘이 없다면 내년에 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