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토론
공항에서 포옹 시간을 3분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65

[오늘의미션] 주말


BY 사교계여우 2022-04-09 02:39:37

[오늘의미션] 주말

01. 어제 상수동 갔다오다가 '오늘의 꽃'에서 산 꽃 세 송이가 이렇게 큰 기쁨이 되어줄 줄 몰랐다. 눈이 막 휘몰아치는데 우산도 없고 눈도 피할겸 후다닥 들어간 꽃집에서 눈에 띄는 아이들을 뽑아온 것인데 이렇게 밝고 명랑할 수가 없다. 시선이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심지어 노란색 버터플라이 꽃은 어제보다 더 꽃봉오리가 방그러져서 활짝 피었다. 아직 봉오리인 아이들이 더 필 것을 생각하니 기대가 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나이가 들었는지 꽃이 좋아진다. 아님 행사 땜에 팔로우한 꽃집 인스타 피드에서 꽃 사진을 많이 봐서 그런가. 사기도 버리기도 부담스러운 꽃은 여전히 어렵지만, 한 두송이가 저렇게 내게 와서 이 별 볼일 없는 오피스텔을 환하게 밝혀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02. 이번 주말은 모처럼 완전한 내 주말이었다. 약속도 없고 조카 보러도 안가고 어젠 목욕도 하고 온전히 나한테만 쓴 주말. 조카를 만나거나 가족들이랑 보내는 주말도 이게 힐링이지 싶긴 한데 이게 다르네. 온전히 나한테만 쓰는 주말이 주는 충만함과 휴식의 느낌은 정말 '쉼', '자유' 그 자체. 결혼해서 육아를 했으면 아마도 60세 정도까지는 절대 못 누릴 그 완벽한 '자유'. 어제 사놓은 꽈베기랑 용문시장 부산어묵 펼쳐놓고 재팬영화제 틀어놓고 딸기 소주 한잔 만들어놓고 나니 그 설렘이란. 영화도 좋았고, 더 없이 좋은 기분이 내일의 불행일랑은 아랑곳없이 천진난만하게 들이닥쳐서는, 급기야 이 흥을 끊기 싫은데 술은 없고, 맥주 2캔 먹자고 배민에서 닭집 배달을 다 시켰다.

03. 여기서 나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다 좋다.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쌓여 행복한 것도 좋고 아직 이런 마음을 잃지 않고 혼자 있어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 나 자신 좋다. 근데! 이 좋은 기분에 들어가는 술이 내게 주는 기분은 과연...진짜인가 가짜인가... 오늘 여기까지는 다행인데, 조금 더 가면 자제력을 잃고 더더더 마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난 1년이 넘도록 나를 자제시킨 그것은 무엇이 되나. 아주 작은 물제비에도 파장을 일으키는 아주 미약한 마음일 뿐이었나. 사실 오늘 정도로 끊은건 나쁘지 않았다. 근데.. 그 취기에서 오는 감정이 무서운 것이다. 그 감정은 끝까지 가도 좋다고 속삭여. 속삭이는 자... 나를 평소에 갖지 않는 감정의 깊이까지 끌고 내려간다.

04.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이번 주말에는 여러가지 쓰고 싶은게 많았는데.. 역시 술이 또 다 기억을 가져가버렸어. 기억이 안난다.

05. 여하튼 나이가 들었지만..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내 안에 뭔가가 생기고,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거지 발싸개 같은 글을 써서 뭐하나 특히나 남들도 볼 수 있는 인터넷에 쓰는 것은 대체 무슨 속셈이냐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래서 오랜동안 다시 손 일기를 썼는데, 좀 더 써놔야겠다는 생각. 얼마 전에 <유 퀴즈>에 나왔던 택배 할아버지가 정말로 '기억'을 잃을 때를 대비한 '기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고, 아 이건 거지 발싸개든 말든 그냥 '기록'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 있겠구나. 기억하지 못하는 '기록'이 필요해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쓰레기 같은 글이라도 그냥 계속 적자고 생각했다.

06. 사실 점점, 차라리 기록하지 않아서 기억나지 않는게 더 좋겠는 일들이 많았다. 나이 들면서 좋은 것은 기억력이 현저히 뚝뚝뚝 안 좋아져서, 안 좋은 일도 한 해만 지나면 가물해져셔 굳이 기록하지 않으면 그 일이 뭐였는지 들쳐봐지지도 않아서 '기록하지 말자 그럼 기억하지 못할거야'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 땜에 어쩔 수 없이 기억하지 못하게 될 '좋았던 일'도 기꺼이 감수하자 싶을만큼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근데 진짜로 고통 속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록의 선별이라니 사치였나 싶다. 기억나지 않는 삶은 텅 빈 허망함과 절벽같은 아득함 그런 것일 것 같아서. 일단 기록을 해놓는 편이 나중에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07. 역시나 1월과 다르게 2월은 3주가 흐르도록 책 한권을 열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리나케 가장 얇은 책을 열었네. 코로나 3년차. 확진자 10만 시대. 작년엔 운동에 진심이었는데 그 목표가 끝나고나니, 약간 기댈 데가 없어서 자꾸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방도 청소하고 부엌도 정리하고 당근에 물건도 내놓고 그러고 있다. 가까운 벗이 곧 먼 곳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마음이 좀 부대끼는 것도 있고 설연휴 끝나고 한 2주 너무 막 했네. 막 했어. 추스릴 필요가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당장 오늘은 잘 해내야한다는 마음으로.